인간이 보편적으로 누리는 권리는 대부분 거래를 통해 획득했다. 참정권은 군복무, 참전으로 얻었고, 링컨의 노예제 해방을 위해선 산업화된 사회에서의 흑인 인권이 필요했다. 반면 노예를 사용하는 것이 경제적 이득이 되는 남부군의 입장에서는 당시 기준으로 재산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보았기에 내전은 불가피했다. 인간이 한 걸음씩 더 많은 보편권을 얻는 과정은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경제적 논리, 즉 교섭권을 가진 이들과의 거래를 바탕으로 시행되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전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만약 노동력이 필요 없어진 산업이라면 노동자들의 파업에 응하느니 회사를 폐업하고 새로 만드는 것이 경제적 선택이 될 수 있는 법이다.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는 시민들의 노동력과 더불어 그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1표로 구성되는데, 과연 이것이 앞선 시대에서도 유효할지는 매우 회의적이다. 이유는 선명하다. 인간 노동력이 정말로 필요하겠냐는 점이다.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나라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대중의 교섭 수단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자원 부국을 보자. 권력자의 주요 수익원은 국가가 가진 국부, 자원 그 자체다. 반면 자원이 부족한 나라라면 권력자라고 해도 세수를 통해 경제를 부양하지 않고는 자신의 계좌를 넉넉하게 만들기 어렵다. 반면 아프리카를 비롯해 여러 중동의 석유 수출 국가들 및 천연 자원을 판매하는 것으로 연명하는 중앙 아시아, 동유럽 국가들에게는 국민들이 가지는 교섭권 자체가 부족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사회는 극단적으로 수직화 되어 있으며 계층에 따라 압도적 부의 격차가 생기고 또한 권력자 입장에서는 국민들에게 어떠한 편의성 혜택을 주는 것이 경제적 이익을 주지 않는다.
인공지능의 발전과 로봇의 발전은 이미 수많은 산업의 민중 교섭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채용의 총 숫자를 줄일 수 있고 결과적으로 사람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다. 이미 일자리는 좋은 품질의 일자리와 사실상 생존 경계선에 머무는 일자리 두 종류로 나누어져 있을 뿐이다. 안정적인 중산층이라는 말은 화폐 가치가 녹아내리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로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사회는 거대한 엘리트 주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
재밌는 점은 정치적으로 극좌, 극우 진영 모두 엘리트 주의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극좌는 무지한 대중을 상대로 이끌 리더이자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 세력이 존재해야 하며, 이들은 검열, 교도주의를 앞세워 자신들이 가진 평등의 가치를 평등하지 않음으로 파괴하며 소수의 엘리트 주의 사회를 만들고, 극우 진영으로 가면 자본에 따른 차별, 위치에 따른 차별 등으로 엘리트 주의 사회를 만든다. 결국 어떤 정치적 세력이 등장하든 모두를 위한 사회라는 것은 가능성이 없는 방향이고 양 극단으로 갈 수록 엘리트 주의 사회로 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기술과 자본 모두 넘쳐나는 이들이 기술 국가를 주창하며 말하는 기술 기반 과두제 정치가 언급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맥락이 아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어떠한 형태로 가든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사회로 향하고 있다는 점은 이 사회가 어떤 고질병에 놓여있는지를 말해줄 뿐더러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해소 불가능한 명제라는 사실이다.
나는 종종 갈등 없는 사회가 지구상에 발현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갈등이 없다? 즉 만약 내가 신과 같아서 내가 미워하는 진영은 지구에서 소멸하거나 자취를 감추고, 모두가 하나의 방향을 향하면 나아질까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갈등이 사라지는 순간이 가장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한 기괴한 괴물이 됐던 순간이다. 모두가 하나의 메시지를 말하는 순간, 그 권력을 얻은 이들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제노사이드와 전쟁 범죄, 인권 탄압,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행태가 반복됐으며, 이는 다수가 소수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양도했기에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역사였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가장 효율적인 정부여서 인류가 민주주의를 택한게 아니라 가장 비효율적이어서 택한 정부의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생각엔 아예 한 쪽이 절멸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은 것 같다. 감정적인 측면에서 무척 공감하는 부분이지만 그 순간부터 부패의 속도는 빨라지고, 하나가 부패하면 다른 음식도 함께 부패하는 것처럼 부패는 전염병과 같이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가 붕괴된 사회를 무척 많이 보았다. 그리고 그 사회는 극단적으로 엘리트 주의, 권위주의, 사상의 검열, 정보 접근의 제한, 표현의 자유 억압 등 모든 핵심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그 사회가 낳은 괴물을 보면 아무도 그곳에 가려 하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모두 동일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자기 모순 속에 사는 이들이 사회엔 무척 많다. 어쩌면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우린 모두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모든 캐릭터들이 마주한 서로 다른 현실이며, 우리는 동일한 현실이라는 좌표 값을 공유하고 있을 뿐 내부 논리는 첨예하게 다르게 작동하는 컴퓨터가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 낭비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인간을 교섭 상대로 두지 말고 자발적으로 교섭권을 박탈하며 권리 장전을 포기하게 만드는 방향이야 말로 가장 현명한 자, 가장 현명한 집단이 할만한 일이다.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민주주의던 민주주의가 없던 크게 중요하지 않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상대하는 인간들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는 것일 뿐이다. 즉 민주주의의 붕괴 또는 붕괴되지 않음과 같은 이분법적 논리는 사실상의 과두제 국가에게도 의미 없는 명제이며, 사람들에게 자발적 선택권을 준 것만 같은 착각, 또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것이 옳다는 프로파간다야 말로 진정으로 중요한 셈이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자들을 보는 건 멍청하다. 그림자를 쫓는 인생은 허망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많은 그림자의 흔적을 취합해도 교차된 실체적 위치를 찾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바보 같고 우스운 일은 없을 것이다.